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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父亲

作者:郑勇浩 阅读:219 次更新:2023-12-14 举报

아  버  지


정용호


내가 사업을 말아먹고 상해에서 영구 빠위췐에(营口鲅鱼圈) 있는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서 일어날수조차 없었다. 집이 걱정 되여 전화 할 때 마다 집은 다 무사하니 걱정 말라던 아버지가 이렇게 중한 병으로 앓고 있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어머니는 수차 나에게 전화로 알리려고 하였으나 아버지가 기어코 말리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고 하였다. 아들의 사업에 지장이라도 있을까 걱정이 되였기 때문 이였다. 그렇다. 아들의 사업을 자기의 생명보다도 더 중하게 여겨왔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보는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 눈길을 돌린 채 나의 방으로 들어가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중병에 시달리는 불쌍한 아버지, 그리고 말아먹은 사업, 모든 것들이 슬픈 눈물로 짬뽕이 되여 하염없이 흘러 내리기만 하였다. 

어머니는 평소와 같이 내 곁으로 다가 와서 달래지도 않고 내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버지 옆에 앉아서 물수건으로 한여름의 더위에 끈적끈적한 아버지의 몸을 씻어 주기만 하였다. 

파란만장을 다 겪은 아버지에게 이젠 그 무슨 고통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대도시 상해에서 잘 나간다고 자신의 최대의 자랑만으로 생각하시던 이 아들이 사업을 말아 먹은 채 집에 돌아왔으니 그 마음인들 얼마나 아팠으랴?!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내색을 전혀 들어 내지 않으셨다. 며칠이 지난 뒤 아버지는 아예 말문이 막혀버려 전혀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주머니 속의 돈 3000원을 톡톡 털어 쥔 채 아버지를 안산병원으로 강박으로 모시고가서 입원시켰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악을 쓰시다가 내가 고집을 부리자 이기지 못하겠는지 말을 들어주었다. 평소에 그렇게 엄하고 강하시던 아버지의 눈길 속에는 나만이 보아낼 수 있는 그런 부드러움이 담겨져 있었다. 그렇게 강한 아버지였지만 아들의 고집에는 수그러들고 말았다. 

아버지는 가족의 기둥이란 그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 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엄숙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일평생 같이 살아오면서 속심 말 몇 마디 못 해본 것이 아들 된 나로서는 가슴에 쌓인 한이 되였다. 하여 나는 동냥해서라도 아버지의 말문만은 꼭 열고 싶은 마음 이였다. 생명이 숨쉬고 있을 때 부자지간에 말이라도 실컷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 하였기 때문 이였다.

입원한지 보름쯤 되였을 때 의사선생님은 아버지더러 퇴원하여 집에 돌아가시라고 하였다. 몸이 기본상 회복 되였다는 것 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문만은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나는 의사선생님의 옷자락을 잡아 쥔 채 애원을 하면서 어떤 대가라도 다 치를 수 있으니 아버지의 말문만은 꼭 열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였다. 하지만 의사선생님은 막무가내라는 듯이 머리만 흔들 뿐 이였다. 옆에 서있던 간호원들도 이 광경을 도저히 못 보겠다는 듯이 머리를 돌리며 소매 자락으로 눈 굽을 훔쳤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 얼마나 오래 동안 통곡을 하며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는 나를 보시고 아버지는 보기 드문 웃음을 지으시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두 손으로 어깨를 힘껏 잡아주시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울지 말라는 뜻임을 난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남자란 함부로 눈물을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내가 어릴 적 부터 가르쳐 왔던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쉬움과 한을 영원히 병원에 《입원》시켜놓은 채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생 말수 적은 아버지였기에 말 한마디 못하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가정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적적해 보이기만 하였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싫어졌다. 사람 만나는 것조차 싫어져 근 2개월동안 집 문밖에도 나가지 않은 채 집구석에 들어박혀서는 밤새도록 텔레비죤을 보기만 하였고 낮에는 낮잠만 잤다. 

아버지는 그러는 내 꼴이 보기 싫었던지 집에 있지 않고 시간만 있으면 바깥으로 나가서는 동네방네 돌아다니다가 끼니때에만 집으로 돌아 오시군 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시장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끼니를 굶을 가봐 걱정이 되여서 였다. 나는 아무리 밥 먹기 싫어도 아버지가 밥을 먹자고 하면 어쩔 수없이 밥상머리에 다가 앉아서는 밥을 먹는 시늉이라도 냈다.

한번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일찍 집에 돌아오셨다. 내가 안방에 누워서 비디오를 보고 있는데 거실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심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웬 일인가 싶어 나가보니 설사를 만났는지 아버지가 돌아 다니시다가 바지에 그만 뒤를 보았던 것 이였다.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에도 아버지는 잘못을 인정하듯이 그저 물끄러미 보시면서 벙글벙글 웃기만 하셨다. 

나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왜서 편치 않으신 아버지를 나무라시냐고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아버지를 화장실로 모시고 들어갔다.

어머니는 나의 나무람에 전혀 탓하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두 눈에서는 오히려 《그래 장하다, 키운 보람 있구나, 아버지 목욕도 다 시켜드리고……》 하는 대견해하는 눈빛이 얼핏 스쳐 지나가는 듯 하였다. 

화장실에 들어와서 나는 아버지의 옷을 한견지 한견지 벗겼다. 나이 30이 넘도록 처음으로 아버지와 알몸으로 목욕하는지라 어딘가 좀 숙쓰러웠고 불편한 기분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어린애마냥 고분고분 내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호랑이만 같으시던 아버지가 이 순간 아들 앞에서 순한 새끼 양이 되였다. 

나는 아버지의 등을 깨끗하게 밀어드렸다.

목욕을 다 하고 나오면서 나는 아버지가 고맙다는 표정이라도 지어 줄 것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나 혼자만의 화려한 생각 이였다. 아버지는 평소와 마찬 가지로 쓰다 달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나는 아버지를 목욕 시켜드린 적 있다. 내가 집에 있을 때 몇 번이나 바지 가랭이를 적셔가지고 집에 들어 오시군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목욕을 시켜드렸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아버지가 바지 가랭이에 오줌을 싸가지고 집에 들어온 것은 아들 키운 《보람》을 느껴보려고, 그리고 아들과 아무런 가리움 없이 허위와 거짓 없는 친밀한 접촉을 위하여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어머니한테서 들었다. 목욕을 시켜드릴 적마다 내 앞에서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안방에 들어가서는 그 흥분된 마음 억제할 수 없어서 왔다갔다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셨으며 얼굴에는 항상 행복으로 젖어 있었다는 것을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나의 책상 우에 소설책 몇 권을 올려 놓았다.

나는 학교 다닐 때와 교원생활을 할 때 작가가 되겠다면서 돈만 생기면 소설책과 문학잡지들을 사들였다. 집의 책장에는 몇 백 권의 책들을 수장해두었다. 하지만 내가 사업을 시작한 뒤로는 동네사방 떠돌아 다녔기에 책 볼 시간이 전혀 없었으며 필을 놓은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였다. 

이번에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오는 사람마다 책을 가져가서는 돌려 주지도 않는다고 하셨다. 그보다도 아들이 사업하느라고 책은 영원히 놓아 버린 것 같아 책들을 몇 마대 폐물장사에게 팔아버렸다. 좀 아쉽기는 하였지만 내 자신도 문학이란 이 포부를 버린 지도 오래 된지라 어머니를 탓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자주 보는 책들은 다른 책꽂이에 꽂아 놓군 하였는데 아버지는 그것들을 팔지 못하게 하고 따로 치워 놓았다가 그것들을 찾아내서 내 책상 우에 올려 놓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일단 책만 들면 모든 잡념을 잊어버리고 책 속에 빠져들어가는 습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하루 점도록 바깥 출입도 안하고 집구석에 들어 박혀 있는 것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책이라도 읽으면 잡생각이라도 덜 하지 않을가 하고 생각 하셨기 때문 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필을 들어 글도 쓰군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나 자신을 책과 글속에 빠지게 함으로써 다른 잡념을 잊어버리기 위한 수단 이였을 뿐 다시 문학인이 되자는 목적은 아니였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평생 아껴 쓰면서 모아두었던 돈 7000원을 나의 손에 쥐여주면서 무엇이든 좋으니 집을 나가서 해보라는 것 이였다. 할 일이 없으면 마작이라도 놀며 도박을 할지라도 제발 집에 들어박혀 있지만 말아달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모든 것에 실망하고 썩어서 패인으로 될 가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 돈이 있는 줄은 어머니조차 몰랐다. 

이 돈은 아버지가 장례 치를 돈으로 모아두었던 것 이였다 

나는 그 돈을 가지고 다시 집을 나섰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나는 다시 의젓한 기업인으로 되였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그때 일기 삼아 쓴 글들을 다시 정리하고 수정하여 혹시나 하는 행운을 품고 문학잡지사에 투고했는데 그것이 발표 되였고 처녀작인 《슬픈 연정》(傷感戀情) 중문작품은 문학상도 받았고 그 뒤를 이어 2005년부터 지금까지 단편소설, 중편소설 등 몇십만자의 소설들을 발표하였고 여러 문학잡지사들과 문학사이트들의 계약작가와 편집으로도 초빙이 되였다. 

나는 기업인과 문학인으로 모두 성공한 행운아로 되였다. 그렇다.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이 모든 것을 보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해 하실 것인가! 하기야 아무런 표정 없는 것은 불 보듯 뻔하겠지만 말이다. 

난 발표된 글들과 기업영업허가증 복사본으로 종이배를 잘 접어서는 아버지의 골회를 뿌린 선인도(仙人島)강물에 띄웠다. 바다로 흘러 들어 아버지가 가신 머나먼 남쪽 고향 땅으로 떠내려 보내고 싶었기 때문 이였다. 

나는 이 영광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고 싶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는 영원히 이 아들의 받침돌이 될 것 입니다. 

이 아들은 기필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 한마디 못해본 말이지만 이 아들이 소리높이 웨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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